플라톤의 ‘국가론’에서는 “도시국가의 정치는 시민의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통찰은 오늘날 더욱 절실한 의미를 갖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소피스트들이 수사학을 이용해 정의를 왜곡했던 것처럼, 현대 정치에서도 우리는 언어가 진실 추구의 도구가 아닌 상대를 공격하는 기술로 전락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현대 한국의 정치 담론은 마치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의 논쟁을 보는 듯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기록했듯이, 당시 신학자들은 하나의 단어 해석을 두고 수년간 논쟁을 벌였습니다. 오늘날의 정치인들도 이와 유사하게 단어 하나의 해석을 두고 끝없는 소모전을 벌입니다. 방송 드라마가 냉소적 대사와 굴절된 인간관계를 재생산하듯, 정치권의 언어는 불신과 의심의 문법을 사회 전반에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특히 우려되는 것은 이러한 현상이 단순한 정치적 수사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 신뢰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는 점입니다. 토마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경고했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가, 현대적 맥락에서 ‘모든 말의 모든 말에 대한 투쟁’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법리적 해석이라는 칼날은 더 이상 정의를 수호하는 도구가 아닌,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무기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우리에게 희망의 단서도 남깁니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볼 수 있듯이, 소크라테스는 진정한 대화를 통한 진리 탐구를 주창했습니다. 그는 수사학적 기교가 아닌, 진실을 향한 끊임없는 질문과 대화를 통해 아테네 시민들을 일깨웠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진정한 대화’의 복원일 것입니다. 말의 올가미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아닌, 언어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높이는 문명의 본래적 가치로의 회귀가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는 이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계속해서 말의 칼날을 갈 것인가, 아니면 대화의 다리를 놓을 것인가.
문명은 불신이 아닌 신뢰에, 파괴가 아닌 창조에 기반할 때 진보할 수 있습니다. 법과 언어가 진실과 정의를 찾는 도구로 회복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문명사회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